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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어진, 새의 편지 새의 편지 총소리와 함께 석양에 물든 날개가 떨어졌다 공포가 자지러졌다 바람이 취한 듯 불그레했다 물결이 피칠갑의 날개를 데리고 흐느꼈다 포수가 쏜 새의 동공을 바라보며 호수는 한동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추락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구름이 뚫리고 하늘에 구멍이 난 날개가 남은 생을 푸두득거렸다 새의 방은 아직 젊었다 물을 깃던 백양나무 숲이 호숫가에 내려와 조문을 했다 구름의 신발 한 짝이 물 위에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날, 숨 죽이고 빈 방에 있었다 노을 속에서 양파같은 안경을 벗으며 심장을 터트렸다 심장 속에선 달큰한 화약 냄새가 났다 바람을 터트리며 커튼이 날아올랐고, 우린 알몸을 맞댄 채 깊어져가는 사랑을 확인했다 흰 꽃이 저녁에 부딪쳐 히히 유령소리를 냈다 숲의 날개를 단 달은 배경이 되어.. 더보기
이어진, 눈송이 레시피 우리는 먼 곳을 향해 날고 있는 눈송이의 이름을 불렀다 눈물이 육각형으로 매달려 있었다 여름의 감정은 눈송이로 흩어졌다 눈송이 안에서 각진 눈물방울 같은 냄새가 뿜어져 나올 때 공기의 눈동자에 가느다란 속눈썹을 붙이고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오래 전 구름의 엽서를 받은 후, 아주 오랜 후였다 내가 가볍게 날아다니는 걸 눈치 챈 걸까 지붕이라면 내가 포근하게 덮어주는 걸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 일곱 개의 사과와 돌멩이가 날아다니는 동화책을 읽었을지도 모르는 눈송이 안에서 객석은 극장의 화면 속을 폭설로 내리는 여름 풍경으로 앉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건 미래에서 온 눈송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눈송이의 혓바닥 위에서 맛나게 스며드는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서글프고 날선 서로의 윤곽을 핥.. 더보기
이어진, 마음의 동굴외 1편 ―윌리엄 볼컴의 ‘에덴의 정원’ 중에서 너에게 기어가는 느낌이 좋아, 내 몸은 점점 커지고 점점 푸르게 점차 느리게 아주 긴 뱀이 되네 이런! 한쪽 눈이 음악에 감염되었군요, 깜짝 놀라는 얼굴로 우리가 소용돌이 칠 수 있을까 황홀하게 자지러지는 회오리처럼 모래바람의 긴 소용돌이, 하얀 엉덩이에 새겨진 몽고반점에 반해 사막은 비브라토를 연주했던 거야, 모래의 음계가 오아시스로 떨어지면 잘린 정오의 사막은 동강난 시간을 들고 흘러내리고 그러나, 백색 늪은 너무 무서워 쩍 입을 벌린 악어 떼가 찾아왔다고 울진 마, 모래 위에 그림자를 거느리고 사는 선인장처럼, 나는 내 그림자를 데리고 흘러갔던 거야 혀에 꽂힌 수많은 모래알을 날마다 파먹어 향긋한 피의 냄새 꿈틀대며 모래 위를 기어갈게 달큰하게 나를 핥아주겠니.. 더보기
이어진, 유령처럼외 1편 유령처럼 구름을 휘날리며 눈이 내린다 멀리서 기적소리 들리고 구름에서 흘러내린 유령들이 나무 위에 옮겨붙는다 천 년 전에 태어난 유령이 나의 팔 다리를 찢어 달아난다 이런 눈송이는 가슴 서늘하게 하지 바람을 휘날리며 눈이 내린다 혈관 속에서 쏟아지는 유령의 기운을 어쩌지 못해, 모퉁이에서 나무는 눈발이 되네 나뭇가지는 신나는 필체로 휘갈기기 시작한다 그럴 땐 나무들이 눈[目]가로 스며들기도 하지 활자가 쏟아지는 계절처럼 당혹스런 순간이 있을까 유령들은 어느 곳을 떠돌다 돌아온 연인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 안의 유령이 당신의 숨결 위로, 정겨운 눈발이 되어 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서로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유령이 되고 있었지 나는 밤하늘의 이마 위에서 눈썹이 되고 싶은 사람 활자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