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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풀밭

이어진, 얼음호수



얼음 호수

 

 이어진 



그늘이 뻗어나가는 호수 위에 우리는 누웠다 아름다워, 너는 여름의 호수 위에 눕고 나는 겨울의 호수 위에 누웠다 불타버린 추억이 차갑게 등 뒤에서 빛났다 말하지 그랬니? 나를 닮아 수줍기만 한 그림자가 겨울 태양의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알몸인 나무들이 바람묻은 웃음을 떨어뜨려주었다 너의 등 뒤에선, 내 등이 차갑게 얼어붙도록 너는 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쪽에선 차가운 바람이 성에꽃을 피우고 있었다 성에꽃 속에는, 또 성에꽃, 또 성에꽃. 겹겹이 둘러싼 꽃들이 내 조그만 알몸을 감고 피어올랐다 너는 여름의 호수 안에서 내게 푸른 나무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 만나던 눈빛의 구름이었다 그, 구름이 비가 되고 눈이 오도록, 나는 참 많은 것을 너에게 받고 있었다 등이 하얗게 얼도록 나는, 여름만 생각하고 있었다 얼음이 다 벗겨지면 봄이 온다고, 너는 여름의 호수 안에서 내게 손짓했다 너의 지느러미는 나무처럼 좋은 냄새가 날 것이다 좋은 냄새는 좋은 생각을 전염시켜줄 것이다 등이 따스해지도록 얼음 속에 들어가 누워 있었다 얼음이 겹겹이 쌓이면 향이 좋은 관이 된다고 했다 관 속에 누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가로수 길 쪽으로 걸었다 저쪽에서 걸어오는 웃음 속에서 기분 좋은 얼음이 쏟아졌다 기분 좋은 내용 안에서 기분 좋은 팔들이 자라고 있었다 기분 좋은 팔을 들어 너의 여름을 두 손으로 꼭 안아주고 싶었다


2016년 <시산맥> 여름호 


이어진, 서울출생, 2015년 <시인동네>로 등단 

빈터동인,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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