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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풀밭

윤대녕의 소설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하여 이어진 Ⅰ. 선행 평론 및 논문 검토 1. 90년대 윤대녕 소설의 특장에 대하여 윤대녕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은 ‘시원에의 회귀’라는 주제로 남진우가 해설을 붙인 다음 더 유명해진다. 남진우는 윤대녕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의 해설에서 “윤대녕의 소설은 존재의 궁극적 신비를 풀기 위해 세상을 편력하는 젊은 영혼의 모험을 다”루고 있으며 “그 모험은 흔히 불가시적인 것과의 대면이나 불가해한 어떤 힘의 개입에 의해 일상의 제도와 질서에 균열이 감으로써 시작”된다고 발화한다. “그는 합리성·효율성·생산성의 노예인 낮의 자아에서 탈각돼나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이기도 하고 무구한 천사 같기도 한 밤의 자아를 찾아나”서며 그러한 과정은 “충일한 실존으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이며 스스로.. 더보기
이어진, 눈사람 바이러스 눈사람 바이러스 눈이 오는데, 눈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눈사람을 만들지 않아서 창문 밖으로 눈이 많이 쌓였다 S역에는 눈사람이 아직도 서 있을까, 녹지 않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없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렇게 오랫동안 눈사람은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날 강변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느닷없이 걸어오는 오월의 눈사람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땐 걷잡을 수 없는 눈발이 내 눈 속으로 휘몰아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눈발이 내 눈동자를 뚫고 몸 속으로 들어와 나를 눈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말을 잃어버렸으니 입이 필요없었고, 입이 필요 없으니 귀가 스스로 사라졌고 무언가 들을 수 없으니 눈만 웃을 수 있었다 .. 더보기
이어진, 장미 장미 이어진 텅 빈 눈동자 속으로 한 무리의 태양이 지나갔다 그 순간 나뭇가지는 꽃잎이 되고 잎사귀는 담벼락이 된다 나는 골목이 되어 길어진다 저기 뛰어가는 어린 아이처럼 두 발이 빨갛게 물든다 빈터 디지털 시집에서 더보기
이어진, 장미의 주전자외 1편 주전자의 구멍에서 가볍게 날아다니는 수증기의 입술을 본다 안개 꽃을 들고 서 있던 사거리의 나를 길을 잃고 걸어가는 바람의 음악소리를 입술 아래에서 느껴지는 휘파람의 촉감을 흰 벽 위로 난 계단을 밟고 오르는 공기들의 무한 행렬을 감싸 안는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태양의 눈동자들 고요한 공기를 뚫고 날아오르는 폐부 속에 감추어 둔 말 콧날의 날개로 날아다니는 장미 꽃잎들 텅 빈 눈동자 안에서 죽어버린 눈물들 끓어 넘쳐 하얗게 증발되는 웃음소리 사거리에서 안개 꽃을 들고 서 있는 사람 그 안에서 만발한 내 안의 작은 장미들 202 호의 그를 만나러 책 속으로 들어갔지 그는 10 페이지에서는 수영을 하다가 15 페이지에서는 라이딩을 했네 라이딩을 하고 나면 그는 집으로 오겠지, 나는 까스렌지 불을 .. 더보기
이어진, 눈송이 레시피 우리는 먼 곳을 향해 날고 있는 눈송이의 이름을 불렀다 눈물이 육각형으로 매달려 있었다 여름의 감정은 눈송이로 흩어졌다 눈송이 안에서 각진 눈물방울 같은 냄새가 뿜어져 나올 때 공기의 눈동자에 가느다란 속눈썹을 붙이고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오래 전 구름의 엽서를 받은 후, 아주 오랜 후였다 내가 가볍게 날아다니는 걸 눈치 챈 걸까 지붕이라면 내가 포근하게 덮어주는 걸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 일곱 개의 사과와 돌멩이가 날아다니는 동화책을 읽었을지도 모르는 눈송이 안에서 객석은 극장의 화면 속을 폭설로 내리는 여름 풍경으로 앉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건 미래에서 온 눈송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눈송이의 혓바닥 위에서 맛나게 스며드는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서글프고 날선 서로의 윤곽을 핥.. 더보기
이어진, 유령처럼외 1편 유령처럼 구름을 휘날리며 눈이 내린다 멀리서 기적소리 들리고 구름에서 흘러내린 유령들이 나무 위에 옮겨붙는다 천 년 전에 태어난 유령이 나의 팔 다리를 찢어 달아난다 이런 눈송이는 가슴 서늘하게 하지 바람을 휘날리며 눈이 내린다 혈관 속에서 쏟아지는 유령의 기운을 어쩌지 못해, 모퉁이에서 나무는 눈발이 되네 나뭇가지는 신나는 필체로 휘갈기기 시작한다 그럴 땐 나무들이 눈[目]가로 스며들기도 하지 활자가 쏟아지는 계절처럼 당혹스런 순간이 있을까 유령들은 어느 곳을 떠돌다 돌아온 연인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 안의 유령이 당신의 숨결 위로, 정겨운 눈발이 되어 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서로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유령이 되고 있었지 나는 밤하늘의 이마 위에서 눈썹이 되고 싶은 사람 활자를 .. 더보기
하고 싶은 말 이어진 있으면 해 보세요 꽃처럼 나는 심장이 뛰고 산등성이에를 나는 새처럼 허리가 가볍다 머릿속으로 한 떼의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나비는 조약돌이 되고 꽃은 시냇물이 된다 나는 꽃의 표정 위에 맺힌 물방울이 된다 물방속 속에 들어앉아 새떼를 촬영하는 바람의 팔이 된다 하고 싶은 말있으면 빗소리처럼 노래해 보세요 양철지붕 위로 한 떼의소나기가 내렸다 하고 싶을 말을 둥둥 울리며 가는 빗소리, 그 빗소리 속에 누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속으로 발자국을 흘려보내면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되어 흘러간다 저기 뛰어가는 어린빗소리처럼 꽃잎이 흠뻑 젖는다 2018년 10월호 이어진 시인 2015년 가을호에 외 4편 당선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더보기
이어진, 후일담 후일담 이어진 #1. 이것은, 코끼리가 되고 싶은 한 사람의 이야기 생각하는 것만으로 책의 발가락으로 걸어 다니는 코끼리 책갈피 위엔 어린 코끼리가 있었네 진흙 같은 글씨가 흘러들었고 입 안에서 어떤 휘파람은 이야기를 초원으로 흘려보냈으며 나무 안으로 구름이 흘러 왔고 그 구름 속에서 야생 코끼리들이 태어나기도 했네 책 속엔 전염되는 초원이 있어 코끼리의 발바닥은 석양의 똥들을 더듬더듬 뭉게곤하였네 사려 깊은 책 안에 손을 넣어 목소리와 코를 맞바꾸었네 그런 날에도 나는 눈을 반짝이며 코끼리의 코와 사랑하기에 바빴고 살고 싶은 사람은 흐뭇한 눈동자를 코끼리에게 박아주곤 하였지 #2 밤이 되자 코끼리는 잠들었고 나와 몸을 바꾼 책은 밤하늘처럼 서성였다 하늘의 동공 안엔 코끼리 한 마리 앉아있었고 돌아서면 .. 더보기
이어진, 호두촛불 호두 촛불 이어진 호두 껍질 안에서 노래 부른다호두의 표피가 타오르면 가장자리에서부터 번져오던 노을빛 살점, 이마를 마주하면 얼굴에 달아오른 불이 머리카락으로 번졌지요 파랗고 노란 불들이 새 그림자로 날아가면, 먼 곳에서부터 들리던 꽹과리소리, 기다림만으로 붉어진 얼굴들이 호두 껍질 안에 앉아, 공중의 다발 속으로 목소리를 던져요 사랑은 움켜쥔 촛대처럼 단호하게 번져가고, 겨울의 이야기는 커다란 울음 다발들,눈 마주치려 달빛 깔린 바닥 위에 껍질을 던져두고, 공중을 날면서 노래하는 새, 달빛은 날아가도 새는 죽지 않는다 촛불은 호두 안에서 우리가 되어가죠붉고 붉은 새의 노래를 부르죠 우리는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죠 중심은 커다란 광장을 남겨놓고 2016년 겨울호에 수록 이어진 시인, 서울출생, 2015년,.. 더보기
이어진, 유목 유목(遊牧) 이어진 입술이 이지러진 곳에 해당화가 피어있었다 유령은 먼지들이 떠다니는 풀안에서 사슴의 입김을 얻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오는 건 염소들의 짧은 다리작은 나무들의 팔들이 태양의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 천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펼쳐져 있는 들판의 주인이 되고 싶어, 나는 양의 피를 얻어 어린 정령[精靈]들에게 먹였다 당신을 지켜보는 건, 풀들의 낮은 포복, 걸음이 들려진 땀의 발가락, 따가운 태양의 통로를 따라 몰려오는 빛의 처녀들 핏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안에 풀의 잘린 손이 있었다 해당화를 불러보고 싶은 콧잔등위로 달력의 얼굴이 스쳐갔다 사슴의 뿔이 더운곳으로 몰려가는 꿈을 꾸었다 옷자락에 묻은 바람을 털어내며 나는 들판 위를 걷고 싶었다발가락의 이지러진 곳에 스며있는 발굽이 욱신거릴 때 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