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Ⅰ. 선행 평론 및 논문 검토
1. 90년대 윤대녕 소설의 특장에 대하여
윤대녕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은 ‘시원에의 회귀’라는 주제로 남진우가 해설을 붙인 다음 더 유명해진다. 남진우는 윤대녕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의 해설에서 “윤대녕의 소설은 존재의 궁극적 신비를 풀기 위해 세상을 편력하는 젊은 영혼의 모험을 다”루고 있으며 “그 모험은 흔히 불가시적인 것과의 대면이나 불가해한 어떤 힘의 개입에 의해 일상의 제도와 질서에 균열이 감으로써 시작”된다고 발화한다. “그는 합리성·효율성·생산성의 노예인 낮의 자아에서 탈각돼나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이기도 하고 무구한 천사 같기도 한 밤의 자아를 찾아나”서며 그러한 과정은 “충일한 실존으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이며 스스로가 제사장이자 희생양이 되어 치르는 제의”라고 해설하였다. “시원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그 모험의 끝에서 그가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허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험이 무가치하거나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진우는 “그의 소설이 자아내는 서정적 페이소스는 소설집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만나볼 수 있는, 수공업적 정성이 느껴지는 미문에 의해 한층 강화”된다며 “이미지 분석을 견뎌낼 수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몇 안 되는 신세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
남진우는 또한 그의 평론 「달의 어두운 저편 - 윤대녕,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목가」에서 “윤대녕의 원시적 감성 primitive sensibility의 시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어두운 물’이라는 사실은 그의 편력이 미래보다는 유소년기의 추억을 향해 열려 있”으며 “그의 꿈은 그의 추억에 다름아니”라 “원점을 향한 회귀의 궤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몽상은 상승의 기쁨보다 하강의 편안함” 과 친숙하고 “외부로의 침잠에 더 경도”된다고 논평하였다.
윤대녕에 관해 여러 편의 평문을 쓰고 있는 황종연의 논문들은 더 세세하다. 황종연은 「내향적 인간의 진실 -신경숙, 윤대녕, 내면성의 문학에 대한 고찰」「유적의 신화, 신생의 소설 -윤대녕론」 「‘바깥’을 향한 글쓰기-하창수와 윤대녕의 소설」에서 윤대녕에 관해 언급한다. 황종연은 “90년대의 근대적-탈근대적 상황에 대한 복합적 관계는 윤대녕 소설의 핵심에 이”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것의 두드러진 형식적, 기법적 특징들 또한 그러한 관계와 무연하지 않”아 보이는데, “무엇보다도 이미지 제시에 유달리 집착하는 경향이 그러하”고 “작중에 나오는 선연하고 풍성한 이미지들- 예컨대 그가 즐겨 구사하는 안개의 음습하고 몽롱한 액체 이미지나 푸름의 그윽하고 그 환각적인 색채 이미지들은 서술되고 있는 대상에 대하여 감각적 표상이 되어주는 기능에 그치지 않고 서사 전개와 분리되어 그것들 자체로 극히 고양된 경험의 순간”을 다룬다고 논평한다. “서사성의 제약에서 풀려난 그러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삶의 ‘강렬화’, 삶의 현재를, 그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감각적인 의미에서 충일한 상태로 체험하는 황홀한 흥분 혹은 쾌락”이라는 것이다.
또한 황종연은 윤대녕 소설의 이미지들은 근대적-탈근대적 삶에 대한 부정의 내포를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그 환각적 이미지들은 근대-탈근대의 개념 자체를 탈각시키는, 삶의 역사성 자체를 소거하는, 어떤 초월적인 비의를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한다. “환각적 이미지가 본래 부재, 결핍, 상실을 벌충하려는 욕망에 연결되어 있듯이, 그의 소설의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가 침묵하도록 강제하는 삶의 비의와 몽환을 소생시켜 불”러 들이며 “따라서 윤대녕의 이미지의 미학에는 근대적-탈근대적 상황에 대한 적응과 반발, 전용과 배격의 복합적인 태도가 극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며 “이러한 복합적인 태도는, 그의 소설을 공정하게 검토하려면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대목”이라고 논평하였다.
이밖에도 「윤대녕 소설에 나타난 환영적 메커니즘」을 연구한 최영지의 논문이 있고, 윤대녕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수많은 고유명사와 이색적인 재료들을 동원하여 자본주의 삶의 일상성 너머의 그 무엇, 존재의 사물성의 생소한 촉감에 대해 환각의 공간”으로 안내한다는 하창수의 논문등 70여 편의 논평문이 있다. 평자들의 논문을 종합해 볼 때 , 공통된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윤대녕 소설의 특장은 첫째 일상 -탈주(비일상)-일상 -과거 -현재의 되풀이 되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시원으로 열려있으며, 둘째, 낮의 문학이라기보다 밤의 문학이며 셋째, 탈근대의 주체들이 겪는 쾌. 불쾌는 초월적 비의를 포함하며, 넷째 풍성하고 선연한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며 다섯째 문장이 미문이며 여섯째 근대적-탈근대적 삶에 대한 부정의 내포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2.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논평들.
남진우는 『은어낚시통신』의 소설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하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일상적 현실에 대한 수평적 탐사로 다른 하나는 일상을 넘어선 세계를 향한 수직적 탐색”이다. “「사막에서」,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눈과 화살」이 전자에 해당되는 작품이라면 「은어」「국화 옆에서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등은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며 그 사이에 「불귀」「카메라 옵스큐라」「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등이 놓”인다는 것이다. 남진우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일상 밖의 세계를 꿈 꾸면서도 장기판의 말처럼 일정한 궤도를 단조롭게 왕복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존재도 어느 한 순간 “마치 누군가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깨어나 그동안 “우리가 묵인해온 가짜 욕망과 제도와 폭력” 바깥으로 떠나게 된다. 그 무엇인가의 출현에 의해 그의 내적 평온은 부서져나가고 그는 일상의 궤도에서 돌이킬 수 없이 ‘탈선’하게 되는데, 그것이 「불귀」에서 누이의 실종으로 나타나며 「카메라 옵스큐라」에선 자신이 의붓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하는 여인과의 조우로 나타나고 「은어」에선 사람을 찾으러 갔다가 대신 만나게 된 여인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으로의 진입은 처음엔 매우 고통스럽고 혼란된 반응을 이끌어낸”다.
윤대녕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는 다른 논의들에서 다소 소략하게 언급된 면이 없지 않다. 반면, 황종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윤대녕이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아의 재생이라는 주제는 사실상 『은어낚시통신』에 수록된 소설 전체에 핵심적인 것”이다. 황종연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징적 가치에 대해 평가하면서 “자아의 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컨대, 남진우가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하여 “수평적 탐사”와 “수직 탐사”의 중간 지점에 놓인 작품으로 일축한 반면 황종연은 이에 대하여 “자아의 재생”이라는 상징적 가치로 “내면의 진정성”에 주목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나타나는 스타일을 좀 더 살펴봄으로써, 90년대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자아 혹은 시대의 무의식이 갖는 그로테스크의 미적 가치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작품 분석
옵스큐라를 통해 본 90년대의 무의식
-「카메라 옵스큐라」의 그로테스크 미적 가치에 대하여
90년대는 ‘탈근대’, ‘근대’, ‘신자유주의’, ‘개인주의’, ‘쾌락’과 같은 쟁점들이 혼종되어 물질적, 문화적 환경 변화를 초래하는 징후적 시공간에 위치한다. “윤대녕의 소설이 90년대의 상황과 맺고 있는 관계는 상당히 복합적이고 양면적”이라는 황종연의 논평은 매우 유의미하다. 윤대녕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렌즈를 통해 90년대의 외면과 내면을 인물의 외면과 내면에 투사하여 혹은 인물의 외면과 내면을 황확동이라는 배경에 투사하여 제시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목록에 끼어있는 황학동의 뒷골목과 그의 분신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옵스크라를 통해 클로즈업한다. 그의 렌즈에 잡히는 황학동의 뒷골목과 미치광이 같은 ‘그녀’는 ‘존재의 불안’, ‘추함’, ‘더러움, ‘살의’, ‘욕망’과 같은 인간 내면의 실체와 90년대 물질적 문화적 변화의 불안이 함축된 인물이다.「은어낚시통신」이 존재의 시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면, 「카메라 옵스큐라」는 여기, 지금의 현실 즉 쾌와 불쾌의 현장을 좀더 세밀하게 촬영하고 있다. ‘나’가 바라보는 세계는 ‘홀림’과 ‘불안’의 이미지로 가득찬 90년대의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비일상적인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다. 본고에서는 렌즈에 담긴 ‘황학동의 뒷골목’과 ‘그녀’와 ‘그녀의 가족’ , ‘나’를 면밀히 추적해봄으로써, ‘나’가 제시한 인간의 불안한 내면과 무의식, ‘황학동의 사라져가는 것으로 표상된 90년대의 도시공간의 의미가 갖는 미학적 가치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푼쿠툼의 공간, 황학동, 그녀
가 몇몇 사진들에 관해 지닌 애착에 대해 탐구했던 시기에 나는 한편으로 교양적인 관심 영역 (스투디움)과, 다른 한편으로 이 영역을 때때로 관통하러 왔고 내가 푼크툼이라 불렀던 그 예기치 않은 줄무늬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세부 요소’와는 또 다른 푼크툼(또 다른 ‘상처’)이 있음을 안다. 이 새로운 푼크툼은 더 이상 형태가 아니라 강도인데, 바로 시간이고 노에마(“그것은-존재-했음”)의 가슴 아픈 과장이며, 그것의 순수한 표상이다.
소설속의 ‘나’는 “모 기업체 홍보실에서 사보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월간으로 발행되는 그 잡지”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취재기사를 쓰게 된다. 주인공인 남자는 표면적으로는 소외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일인인 ‘나’로 표상된다. “잡지사, 기자, 막 등단한 시인, 출판사 편집장, 북 디자이너”들이 모이는 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스투디움의 세계이며 ‘밝은 방’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좀 길다 싶은 단발머리, 상대방의 어깨 뒤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아득한 눈동자, 작고 붉어 보이는 입술 사이로 내비치는 고른 상아빛 치아, 오리알처럼 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검은 얼굴, 미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박힌 보랏빛 반투명의 점, 아득히 환청처럼 들리는 비음(鼻音), 아주 없어 보이는 깡마른 가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 묘하게 뒤섞여 풍기는 이미지는 아주 독특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방심하고 보면 그저 평범하게만 보일 뿐인 기묘한 얼굴이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나’를 ‘홀릴’만한 외면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 특유의 ‘어두운 방(푼크툼의 세계)에 존재함으로 ’나‘를 유혹한다. ‘그녀’는 90년대의 아픈 ‘과장’이며 ‘순수’로 기억될 것임에 트림없다. “갈 데가 없어서요”라고 한 숨을 푹 쉬는 그녀는 사실은 ‘나’의 내면(어두운 방)이기에 ‘나’는 ‘그녀’와 금방 친해진다. “사이사이 정신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와 “어느새 그녀와 나는 손을 움켜쥐고 있”는 상황은 ‘나’가 ‘그녀’를 통해 ‘나’의 내면을 응시하고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빠져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그녀’를 통해 ‘어두운 방(푼크툼)의 세계로 진입한다.
어색하게 여관 문을 들어서서 요금을 지불하고 이층 걸레짝 같은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제정신이 들어 있었다. 이내 습기 찬 방안 공기가 온몸을 휘감아왔다. 방 구석구석에서 베어나오는 곰팡이 냄새와 북북 찢어놓은 도배지, 쥐오줌으로 얼룩진 천장, 아무렇게나 개켜져 있는 눅눅한 이불, 때 낀 베갯잇, 두루마리 화장지…….
윤대녕에게 인식되는 90년대의 내면은 누추하고 눅눅한 ‘어두운 방(푼크툼)’의 세계다. ‘나’는 정신착란을 보이는 ‘그녀’와 ‘여관’의 모습을 동일시한다. ‘나’가 이성적인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그녀에게 끌려가는 것은 다름아닌 ‘나’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녀’이며 ‘그녀(나의 어두운 방)’는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그녀’로 표상되는 세계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최영지는 “윤대녕 소설에서 여성화자보다 남성화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때 여자는 실체가 아닌 몽상적 인물로 등장”하며 “이때 ‘여성’은 기호 즉 환유적 이미지로 존재”한다고 발화하는데 필자가 파악하는 맥락과 유사하다. 즉 여성은 실제하는 것이 아닌 ‘나’안의 타자 혹은 타자(나의 어두운방)안의 나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안(二眼)리플렉스 카메라, 놋그릇, 청동조각, 석등(石燈), 도라깨, 키, 풍로(風爐), 맷돌, 부서진 음반, 빈 양주병, 가마니, 서양식 다이얼 전화기, 군화, 탄띠, 수통, 입다 만 옷들, 뒤축이 나간 구두, 프라이팬, 가스버너, 신일선풍기, 대한120냉장고, 태국산 보석, 탄트라의 인형들, 화구(畵具), 전자계산기, 중절모, 엽총, 새·사슴·노루의 박제들, 베토벤, 남인수, 자동차 핸들, 모형 폭스바겐, 국기봉, 나프탈렌, 축음기, 독수리표 전축, 안경테, 드릴, 양수기 모터, 쥐약, 정력제, 지네 묵은 책들, 양은 냄비, 가시관을 쓴 예수의 초상, 파라솔, 상평통보를 비롯한 엽전 및 지폐, 열쇠고리, 비디오테이프, 참나무 액자, 텔레비전 수신용 안테나, 주걱, 목기(木器), 청와(靑瓦), 염주(念珠), 양산, 부처님들, 줄 달린 롤렉스 시계, 나침반, 만화경(萬華鏡)...... 그리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기억에서 달아난버렸던 모든 것들,
주인공 ‘나’의 렌즈안으로 클로즈업되는 90년대의 물건들이다. 풍로(風爐), 가마니, 서양식 다이얼 전화기, 대한120냉장고 들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다. ‘현대판 해적들의 소굴’이라는 부재를 달아 원고를 마감하고 ‘나’는 ‘그녀’와 다시 조우한다. “사진은 지시체와 찍는자만 인증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잊기 쉽지만 사진은 ‘시간’을 필연적으로 인증한”다고 바르트가 말했듯이, ‘나’가 찍은 위의 목록들에는 90년대의 시간들이 역력히 ‘어두운 방’에 진열되어 있다. 90년대는 세기말적인 우울과 물질적 문화적 변화에의 불안과 기대가 함께 공존한다. 마찬가지로 ‘진’이라는 여자가 주는 이미지에는 ‘불안’과 ‘기대’ 혹은 ‘매혹’과 ‘혐오감’이 공존한다.
‘나’는 ‘진’이라는 이름의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그 음습한 밤의 기억들이 복면을 쓴 모습으로 부상”하는 체험을 한다. 주인공이 진정 마음에 두고자 하는 장면은 이 푼쿠툼의 세계이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 것임을 알고 있다. “사실은 저 지금 쫓기고 있어요”라는 대사는 ‘그녀’와의 만남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녀’와의 만남 또한 ‘사라져가는 것들’의 목록에 포함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결국 ‘나’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인증하고자 했던 것은 90년대의 쓸쓸하고 비루한 일상들, 쫓김, 살의가 가득한 도시 공간에서의 그로테스크한 체험이다. 그 체험은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푼쿠툼의 ‘아픈 과장’과 ‘순수’의 세계인 것이다. 홍보실 직원인 ‘나’는 도시 일상에서 찌들고 피로한 기색을 ‘어두운 방’의 이미지인 ‘그녀’에게 매혹을 느낀다. 그러나 ‘어두운 방’의 상징인 ‘그녀’의 세계엔 안식이 없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점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불온하고 비도덕적이고 공포스러운 이야기에 끌리게 되는지, 주인공은 왜 이러한 세계로 독자들을 이끄는 것인지, 혹은 왜 정신없이 끌려가는 것인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미적 체험을 얻게 되는지, 어떤 내적 변화를 갖게 되는지에 주목하여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2. 이질적인 아름다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
분명 ‘사라져갈 것’들의 대명사인 황학동의 이미지는 편안하고 안온한 이미지는 아니다. 이상적인 즐거움이 아닌, 불편하고 불온하고 불안안 이미지들, 그러한 이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통해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미적 경험을 하게 된다. 곧 그 불온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잘 곳이 없”는 가련한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말하는 비정상적이게 사람의 의식을 옥죄며 홀리는 이미지다. ‘그녀’가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말하는 부분은 주인공 ‘나’의 내면에 웅크린 ‘살의’일 것이다. 인간 심층에 은페된 추한 진실에 대한 폭로의 경로로 ‘나’는 ‘그녀’의 발화를 사용한다. 현대는 그로테스크한 욕망의 출현을 즐기는 세기다. 1990년대는 세기말 적인 불안과 기대, 희망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시간대이다. 윤대녕은 20세기와 이별해야한다는 강박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목록과 더불어 ‘그녀’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녀’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공간 위에 있다. ‘나’가 일상에서 탈일상을 오가며 신비를 체험하는 존재라면 ‘그녀’는 줄곧 탈일상의 시공간 위에 위치하며 ‘나’를 교란시키고 ‘나’ 를 불편하게 하는 인물이다.
페티시는 “동물성 내지 육체성의 도착적 재현으로서 이미 기원전부터 인간에게 웃음과 공포, 고귀함과 천박함, 매력과 혐오감 등의 기이하고 이질적인 쾌락의 감정을 선사해온 인류의 오래된 감정이 그로테스크”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극의 목적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감정을 정화’시키는 데 있다고 여겨져 왔”는데, 프로이트는 「정신병적 증후를 보이는 극중 인물들 Personnages psychopathiques a la scene」의 글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는 분명 우리 속의 감정이 어떻게 ‘분출’하게 되는가가 문제”라고 하였다.
“그녀는 탐욕스런 아귀가 되어 나를 못살게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 시간이 갈수록 정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밤낮없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생각다 못해 나는 그날 술자리를 같이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그녀에 대해 뭐 아는 것이 없는가고 물어보았다.”
“그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저를 쫓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갈 수가 없단 말예요. 저 좀 도와달라구요. 우린 밤을 함께 보낸 사이잖아요.”
“조금 전 내가 빠져나온 거리 한모퉁이, 물밀 듯이 차오르는 하얀 빛의 저 끝간데서 붉게 아른거리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튀어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포와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의부였어요. 저를 간음했거든요. 아니면 간음, 하고 있거든요. 제가 목을 조르자 그가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나’에게 1990년대의 황학동에서의 그로테스크한 현실 체험이기도 하지만 다가올 세기에 대한 흥분과 막연한 공포의 암시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에게 흡입되듯 끌려가게 되는데, 이는 ‘그녀’와의 미묘한 대화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고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그녀의 기이한 아름다움 혹은 밀고 당기는 ‘그녀’의 홀림 규칙 때문이기도 하다. 글을 읽는 내내 분출되는 ‘공포’, ‘기이함’, ‘매혹’, ‘연민’ 같은 감정들을 독자는 분출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독자에게 미적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독자는 ‘공포’ ‘기이함’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보면서 혹은 읽으면서 연민을 느끼게 되고, ‘우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카타르시스의 미적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가 ‘그녀’에게 매혹되어 ‘나’의 감정을 분출하게 되는 시공간적 배경은, 90년대의 황학동 뒷골목이며, 그곳은 곧 ‘나’의 내면이자 ‘나’의 타자인 ‘그녀’의 퍼포먼스’를 통해 집약된다. 요컨대 ‘그녀’로 표상되는 90년대의 도시공간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연민하게 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불투명한 시공간이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의 현존을 성찰하고 투시하게 하는 시공간위에 위치하기도 한다.
3. 연민과 푼쿠툼, 그로테스크의 승화
현대의 전위적인 예술은 바르트의 논리로 말하자면 편안한 즐거움(기쁨) plaisir을 주는 작품 oeuvre이기보다 불편한 즐김(향유) jouissance을 요하는 텍스트 texte라, 대체로 이상적이기보다 이질적인 아름다움 그러니까 그로테스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경향을 띤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예술이라 믿는 이들에겐 불편한 사실이지만, 현대의 예술은 가시적인 아름다움 이면의 인간적 본질, 허상의 심층에 은폐된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진실에 대한 물음이고자 한다. 그로테스크는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혹은 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를 버거운 비극, 부정하고 싶은 삶의 크로테스크에서 구하고자 했던 까닭도 바로 그 같은 맥락에서다.
위고는 “무참한 폭소를 띤 끔찍한 얼굴을 그는 자신의 목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영원한 웃음이란 인간의 어깨가 짊어지기에 얼마나 버거운 짐인가!”라며 슬프게 웃는 남자 귄플렌 Gwynplaine을 통해 인간 삶의 희비, 그 모순과 갈등의 그로테스크한 국면을 본격 화두로 삼았다. 그로테스크한 글쓰기의 작가 미셸 레리스 등을 비롯한 현대의 예술가들은 기이한,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한 이미지와 글들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위에 제시한 -“현대의 예술은 가시적인 아름다움 이면의 인간적 본질, 허상의 심층에 은폐된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진실에 대한 물음”-명제는「카메라 옵스큐라」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황종연은 “윤대녕이 제시한 도시 공간의 상징적 차원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뛰어난 단편 중의「카메라 옵스큐라」가 그의 단편 중에서 단연 표본이 될만한 단편”이라 논평한다. 다음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집중되어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문장들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 가본 ‘세계’는 “검불은 빛”이 흘러나오는 “암실 같은 집 안”, “나병 환자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오랜 고문에 시달리다가 출감한 사람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의 의부로 표상되는 세계는 어두운 본능과 광기의 세계이다. 그는 그러한 세계에 접하는 순간 그의 내부에서 “본능적인 살의”가 솟아 오름을 느끼고 그 자신도 그녀가 있는 “휘황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위의 장면은 ‘나’가 결국 ‘그녀’의 세계로 미끄러지듯이 빨려 들어가 체험하게 되는 ‘공포’와 ‘기이’의 체험이기도 하며, 정신병자로만 여기던 ‘그녀’와- ‘살의’를 느끼는 부분에서- ‘소통’이라는 단어를 상기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로 표상되는 90년대의 상황은 표면적으로는 민주화가 되어 안정적인 정치상황을 보이는듯하지만 ‘오랜 가난에 시달린 저소득층들’과, ‘오랜 고문에 시달리다가 출감한 사람들’ ‘신자유주의 물결아래, 허덕이는 소시민들이’ ‘살의’를 품듯 살고 있는 세기말의 정황이기도 하다. 오랜 독재의 청산 뒤에 남은 도시공간의 삶은 희망을 품고 있는 듯 하지만 오랜 결핍으로 인한 정신착란적인 증세를 보인다. ‘그녀’와 ‘나’ 뿐만 아니라, 황학동으로 표상되는 도시 전체가 ‘괴기’와 ‘공포’ ‘혐오스러움’으로 들끓고 있는 「카메라 옵스큐」에 비춰지는 풍경은 낯설고도 섬뜩하다.
‘갑충’처럼 터덜터덜 걷는 ‘나’가 걸어가야 할 21세기의 삶은 1990년대의「카메라 옵스큐」의 그로테스크한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로테스크가 자기 콤플렉스 속으로의 도피, 자기 속의 유폐가 아니라 상실한 대상-자아, 그 타아를 향한 욕망 아니면, 소통”이라 한다면, 이 소설은, 지금 여기(2017년)의 삶은 비루한 90년대의 황학동의 삶에서 멀리 와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한 개인의 일상 탈출 경험을 통한 자아의 탐색 및 타자와의 소통에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공포’와 ‘혐오감’의 감정 표출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을 하게 한다. 요컨대 그로테스크한 스토리를 통과함으로써 독자는 정화되는 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갑충’으로 걸어가는 ‘나’가 아직 황학동에 살고 있을 것 같다. 20년이 훨씬 넘는 ‘나’보다 지금 황학동에 살고 있는 ‘나’는 조금 더 변형되고 변이된 기괴한 모습의 ‘갑충’일지도. 어쩌면 ‘그녀’의 “하늘색 단화”를 생각하며 변화된 도시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힘없고 무능력한 ‘갑충’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희극스러운 것과 끔찍한 것, 매혹과 혐오감이 존재하는 예술작품에의 수요가 증가하는 지금, 이 소설은 ‘사라져가는 것들’의 90년대의 표상으로 첨예하게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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